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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상과 재현, 물질과 비물질의 원환운동
이경모/미술평론가

작가에게 사탕은 어떤 의미일까? 이흠에게 이는 끊임없이 자문자답하면서도 만족할 해답을 내놓지 못한, 수많은 레퍼런스 속에서도 한마디로 단정할 수 없는 미스테리한 주제이다. 그에게 사탕은 완성태로서의 오브제라기보다는 가능태로 존재하면서 무궁한 형식과 스토리를 배태하는 마성의 주제임은 분명하다. 달콤한 윤기를 머금은 그의 사탕이미지는 우리의 기억 저편에 남아있는 사탕의 치명적 유혹을 떠올리게 한다. 이 매력적인 이미지는 잊혀진 유년기 욕망을 일깨움으로써 사유를 증폭시키고 동시대 미술담론의 다양한 가치들을 소환하기도 한다.

사실적 재현의 추상
전통적 모방이나 이미지로의 재현은 대상이 ‘있음(being)’을 전제로 한다. 따라서 그림은 언제나 존재의 지표인 것이다. 가시적이든 비가시적이든 이미지는 존재 자체가 아닌 ‘그 무엇’을 유발시키는 닮음을 기본 속성으로 한다. 이흠의 예술도 마찬가지다. 이흠은 회화의 역사와 함께 존재해온 자연의 정확한 재현에 뿌리를 둔 작업을 염두에 두고 있다. 그러나 예술가는 천재성과 성실함 이전에 사물과 현상을 냉철하게 주시하고 이를 자아의 언어로 진정성 있게 표현할 때 관객의 공감을 획득할 수 있다. 이흠의 예술이 주목되는 이유는 그의 회화가 이 지점에 부합되기 때문일 것이다.
이흠의 사탕은 윤기를 머금은 채 다채로운 원색의 리듬을 보이며 투명한 비닐봉지 속에서 존재를 뽐내는가하면 속살을 노출시킨 채 우리를 유혹하기도 한다. 이 사실적 재현의 무한한 가능성은 존재하는 모든 것들에 대한 경의로 보이기도 하지만 다른 한편으로는 하찮은 대상에 가치를 부여하는 연금술로 비쳐지기도 한다. 자연 안에서 목도하기 어려운 화려한 색들의 나선형의 말림 속에서 우리는 달콤함을 느끼거나 사탕의 흘러내리듯 정해지지 않은 자유로운 형태와 감각적 표현에서 자연을 발견한다.
역설적이게도 이처럼 물성과 비물성이 충돌하면서 발산되는 회화적 긴장성은 모더니즘회화가 강조한 절대성의 영역에 근접하는가하면 대상의 본질에 다가가고자 하는 추상회화의 열망과 닮아있기도 하다. 이것이 재현을 초극하는 이흠 회화의 단면적 양상이다. 사실적으로 표현한 화면은 기존 작업에서 형태가 뒤틀리고 산수로 재구성한 작품에 이르러 상품과 예술의 경계를 허물고 있다. 이는 재현의 논리를 넘어서는 것으로써 그리는 작업이라기보다는 마치 들에 곡식을 심는 것과 같은 표상활동으로 읽혀진다. 사탕과 산수라는 재현이미지는 이미 재현의 가치를 초극한 기호로써 존재하나, 그의 화면에서는 이 기호조차도 인식부호라기보다는 표상 자체로 존재론적 의미를 획득하는 다면적 소통의 통로가 된다. 마치 현실의 끊임없는 복제가 원본 없는 복제로, 시뮬라크르가 재현불가능성으로 미끄러져 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나선의 원형과 중첩은 바로 ‘텅빈 풍요와 행복’을 의미하며 역설적이게도 ‘중첩(overlapping)’이라는 비표상적 조형언어를 내포한 반전의 뫼비우스 띠처럼 욕망을 전제로 한 반복이 함의되어진 재현과 시뮬라크르의 연속이다. 사탕이라는 작품의 소재들은 이미 존재했던 나선의 형태지만 그것은 마음과 기억 속에 존재할 뿐, 실제는 존재하지 않는 잔상의 간접체험인 것이다.

풍요와 행복의 원환운동
이흠 사탕작업의 형태적 특징은 ‘비틀기(distort)’ 이다. 비틀기를 통해서 안과 밖, 원본과 복제는 하나의 면에서 소급되어 다시 하나의 면으로 비틀려 환원된다. 그의 사탕이미지는 한번의 뒤틀림으로 꼬여 나누어지지 못하고 하나로 이어지는 연연(連延)의 시작이 출발점이 되고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의 또 다른 시작을 만든다. 시작은 있는데 끝은 없다. 뫼비우스의 띠처럼 원상태로 돌아가 힘의 평형 상태를 유지하고자 독특한 형태의 힘의 균형이 나타나는 것이다. 이처럼 이흠의 작업은 들뢰즈가 말한 ‘원환운동’이자 무한히 자기증식하는 패러디의 성격을 띠고 있다. 시뮬라크르적 생동인 것이다.
출발점에서 뒤틀린 한 바퀴를 돌아 다시 시작점으로 되돌아오니 거울에도 비치지 않던 사물의 뒷면에 도달하게 된다. 다시 둘로 나뉘어 앞으로 앞으로만 가면 한번 더 꼬이게 되고 또 다른 나의 뒷면으로만 다다르는 끝없는 여정이다. 이차원에서 삼차원으로 그리고 아직 가보지 못한 사차원으로 이어지는 판도라의 상자, 이 찰나의 호기심은 또 다른 출발점이 되는 고리, 이 위상기하학적 아이러니는 동시대 미술의 주요개념인 시뮬라크르에 적용된다. 이것은 무한반복이자 또한 무한복제이기 때문이다.
한편 이흠은 사탕을 “풍요와 행복의 은유적 오브제”라고 말한다. 감각적으로 표상된 이흠의 사탕은 상품과 예술의 경계를 해체하고 화려하면서도 달콤한 것이 주는 시각과 미각의 접점에서 물질성과 비물질성을 동시에 포괄한다. 아울러 사탕이라는 세속적(?) 주제를 통해 감각적 요소를 표현함에 있어 극사실에서부터 추상, 산수이미지부터 설치작업에 이르기까지 다양한 방식으로 풀어낸다. 우리의 일상생활이 규격화되고 판에 박힌 듯 소비재의 과속 생산에 종속된 듯 보일수록 이흠의 예술은 일상성에 밀착하여 이러한 층위들 사이에서 작동하는 예술의 사회적 기능과 역할에 대한 새로운 가능성을 부각시키고 있다. 사회의 분화와 예술에 대한 시민적 욕구, 그리고 이미지의 범람으로 재현과 실재의 관계는 역전되고 예술가와 관객의 차이도 모호해졌다. 급변하는 현대미술의 흐름 속에서 새로운 미술의 가능성은 이미지의 재현 방식이나 기법보다는 그것을 통해 어떻게 세계를 바라보는가, 혹은 관객이 어떻게 미술의 존재방식에 개입하여 함께 연출하느냐의 문제가 중요한 관건이 된다. 상품과 욕망의 혼동과 범람 속에서 이미지에 의해 이끌리는 우리의 현대적 삶의 분기(分岐)는 극복해야 할 상황인지 낙관해야 할 상황인지 이견이 분분하다. 그러나 현시점에서 우선시해야 할 점은 이미지를 받아들이는 데에 있어서 인식의 해방과 해석의 참신함이다. 이흠의 이 매력적인 사탕이 우리에게 시사하는 바가 바로 이 부분일 것이다.

SWEETS
조의영

이흠의 사탕그림은 감각적이다. 극사실회화 특유의 묘사와 집요함 대신 전체 회화의 구성과 색채의 조합과 같은 감각적인 부분에 더 많은 공을 들인다. 화면 가득히 확대된 오색찬란한 사탕은 우리의 미각과 시각을 동시에 자극한다. 투명한 비닐에 쌓이거나 유리 진열장 안에서 빛나고 있는 달콤한 것들은 신비하고 영롱하게 보이기까지 한다. 실물인 듯 사진인 듯 사실적으로 묘사되어 있지만, 달콤한 것들이 주는 여운은 몸의 오감을 타고 확산되어 기억 속에서 증폭된다.

사탕을 소재로 극사실회화와 추상회화를 모두 그리는 이흠의 작업은 달콤한 것들의 물질성과 비물질성을 함께 보여준다. 이전까지는 사실화 범주 안에서 사탕 혹은 달콤함을 찾고자 했다. 하지만 작가가 표현하고 싶은 감각적인 부분을 사실화 기법으로는 만족스럽게 표현할 수가 없었다. 견고하게 잘 그려진 사탕 앞에 서면 사탕을 입에 물었을 때처럼 달달함이 입 안 가득 퍼진다. 이내 입가에 미소가 번지면서 어깨의 긴장이 풀어진다. 잠시 눈을 감으면 사탕 하나에 행복했던 순수한 시절이 생각나기도 하고 누군가와 행복했던 아름다운 장면이 머리 속을 스치기도 한다. 매우 복잡한 감정과 느낌을 담아 내기 위해 이흠 작가는 사실적인 회화의 다음 단계로 영역을 넓혀야 했다. 사실화는 수많은 자료를 바탕으로 제작하기 때문에 어느 장소 건 사탕이 보이면 핸드폰 카메라를 꺼냈다. 하지만 추상의 방식은 사전 스케치와 우연적인 효과가 만나 감각의 순간을 재현해주었다. 두개의 다른 장르를 표현함에 있어 한가지 표현 방식에서 오는 갈증을 해갈해준다. 오브제 자체에 진중하게 접근하고 싶은 순간에는 사실화를 강렬한 감각으로 물감이 유연하게 캔버스 전반을 흐르고 표현을 하고 싶을 때는 추상적인 접근을 한다. 손이 잡힐 듯 퍼져 나가는 색채의 아지랑이가 머리속에 잔영처럼 남을 때가 있다. 물에 물감을 푼 듯 연기에 흩어져 은은하게 눈앞에서 사라지는 것처럼 감각의 순간은 그렇게 우리에게 스며들 듯 기억된다. 이따금 추상회화는 말 안 듣는 아이처럼 작가의 마음에 만족스럽지 안을 때가 있다. 그럴 때는 과감히 사실화로 넘어가곤 한다. 극사실회화를 위해 붓을 잡으면 딱딱하게 굳어 있던 손끝이 다시 풀려 움직이는 희열이 있다. 생각이 확장되고 반복되지 않는 과정에서 사탕이라는 오브제는 더 이상 중요하지 않다. 그리는 오브제의 본질은 사라지고 그리는 행위만이 남아 있게 된다.